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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남북화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한의 국민들과 김일성 일족의 화해는 의미도 없지만 가능하지도 않고, 남한 국민과 북한 주민의 화해는 하시라도 가능하지만 김일성 일족이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주권이 김일성 일족을 떠나 국민에게로 귀속되기 전에는 남북화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며,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평가는 그것을 팔아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김씨일족에게나 중요할 뿐이다. 왜 북한의 김씨들을 향해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야 남북화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남북화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한의 국민들과 김일성 일족의 화해는 의미도 없지만 가능하지도 않고, 남한 국민과 북한 주민의 화해는 하시라도 가능하지만 김일성 일족이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주권이 김일성 일족을 떠나 국민에게로 귀속되기 전에는 남북화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며,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평가는 그것을 팔아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김씨일족에게나 중요할 뿐이다. 왜 북한의 김씨들을 향해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야 남북화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조선족 출신이라 남한편도 북한편도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항일연군의 편에서 쓴 글이고, 김일성의 치부를 밝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김일성 편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은 만주나 북한 아닌 항일연군 출신자들에 의한 피해국인 한국에서 간행하고 판매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항일연군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투쟁을 했다면 왜 그들이 주도한 나라에서는 책을 내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가?  
자신이 조선족 출신이라 남한편도 북한편도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항일연군의 편에서 쓴 글이고, 김일성의 치부를 밝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김일성 편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은 만주나 북한이 아닌, 항일연군 출신자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만 입은 한국에서 간행하고 판매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항일연군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투쟁을 했다면 왜 그들이 주도한 나라에서는 책을 내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가?  


만일 전후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만주 조선족들의 항일연군에 대한 평가도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만주국 시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이 항일연군이 아닌 만주국편에 섰다는 것이 당시 기록들에서도 밝혀진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만주의 조선족과 중국인들이다. 세월이 바뀌고 권력 지형이 뒤집어지니 후손들은 조상과 반대편에 서서 마치 자기네들 조상은 반만항일 투쟁을 열심히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만일 전후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만주 조선족들의 항일연군에 대한 평가도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만주국 시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이 항일연군이 아닌 만주국편에 섰다는 것이 당시 기록들에서도 밝혀진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만주의 조선족과 중국인들이다. 세월이 바뀌고 권력 지형이 뒤집어지니 후손들은 조상과 반대편에 서서 마치 자기네들 조상은 반만항일 투쟁을 열심히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2020년 8월 14일 (금) 09:5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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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金日成) 1912 ~ 1945 (상, 중, 하)》 (서울셀렉션, 2020)는 재미 조선족 작가 유순호(劉順浩, 1962~ )의 저서이다.[1] 《김일성 평전》(상, 중, 하)이란 제목으로 간행했던 것을 증보, 개제(改題)하여 다시 간행한 것이다. 저자는 30여년간 200여명의 만주 동북항일연군 연고자들을 인터뷰하고, 공개되지 않은 수많은 항일연군 관련 문헌을 열람하고, 각국에 흩어져 있는 문헌들을 샅샅이 조사하여 해방전 김일성의 행적을 가장 완벽하게 밝혀낸 책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자의 말과는 달리 그가 직접 들었다는 증언들은 당시로 부터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나온 것이라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책 내용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저자는 김일성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것을 모두 바로잡는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이 새로운 잘못된 주장을 내놓은 것도 있다.

보도자료

조선족 출신 유순호 작가, 논픽션 다큐멘터리 '김일성' 출간

개요

김일성은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들을 하게되는 북한 지도자 시기의 행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사람이다. 어떻게 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는지의 과정을 밝히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지도자로서의 김일성 아닌 그 이전의 일만 주로 취급하며 그것으로 김일성에 대한 평가를 내리려 하고 있다.

동북항일연군과 거기서의 김일성 등 조선인들의 활동은 대한민국 건국과 아무 관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중 북한으로 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 6.25 남침의 전범들이다. 그들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피해는 일제가 끼친 피해보다 몇 배나 더 크다. 그런데도 그들의 항일투쟁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견해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주입하려 드는 것도 상당히 거슬린다. 김일성이 회고록대로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항일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니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소련의 앞잡이가 되어 북한 주민의 주권을 강탈해가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가두며, 남침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국가를 사유화하여 최고권력을 자손들에게 세습한 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말로 귀결된다. 중국 공산당 정부와 불화 끝에 자유민주국가 미국으로 망명해 사는 저자가 아직도 이런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김일성 때문에 해방이라도 되었다면 그의 해방전 행적도 중요하겠지만, 그는 남들이 목숨걸고 독립운동하던 해방 직전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하게 지냈다. 전쟁 끝난 후에 슬그머니 몰래 귀국해서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자가 소련군의 앞잡이가 되어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나서 자기가 북한을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조작하고, 수많은 항일투사들을 숙청, 처형했다. 그의 해방전 행적도 높이 평가할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남북화해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남한의 국민들과 김일성 일족의 화해는 의미도 없지만 가능하지도 않고, 남한 국민과 북한 주민의 화해는 하시라도 가능하지만 김일성 일족이 가로막고 있다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의 주권이 김일성 일족을 떠나 국민에게로 귀속되기 전에는 남북화해는 애초에 불가능하며, 남한 사람들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는지 아닌지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김일성의 항일투쟁 평가는 그것을 팔아 권력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김씨일족에게나 중요할 뿐이다. 왜 북한의 김씨들을 향해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높이 평가해야 남북화해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조선족 출신이라 남한편도 북한편도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다고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항일연군의 편에서 쓴 글이고, 김일성의 치부를 밝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김일성 편을 들고 있다. 그러면서도 책은 만주나 북한이 아닌, 항일연군 출신자들에 의해 막대한 피해만 입은 한국에서 간행하고 판매하는 것도 아이러니다. 항일연군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위대하고 대단한 투쟁을 했다면 왜 그들이 주도한 나라에서는 책을 내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하는가?

만일 전후의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이 승리했더라면 만주 조선족들의 항일연군에 대한 평가도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실제 만주국 시절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 조선인들이나 중국인들이 항일연군이 아닌 만주국편에 섰다는 것이 당시 기록들에서도 밝혀진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만주의 조선족과 중국인들이다. 세월이 바뀌고 권력 지형이 뒤집어지니 후손들은 조상과 반대편에 서서 마치 자기네들 조상은 반만항일 투쟁을 열심히 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작가(소설가)이며, 이책은 학술서가 아니라 넌픽션 소설형태로 집필되었다. 너무 잡다하게 많은 인물들과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다 다루고 있어 분량이 지나치게 방대하며, 읽기도 지루하고 책값도 만만치 않다.

이미 간행된 《김일성 평전 (상)》과 인터넷상에 발표한 글 등에서 파악된 사실관계의 문제점만 우선 지적한다.

김일성 회고록은 김일성 본인이 집필했는가?

저자는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2] 총8권 중 김일성 사후에 나온 계승본 7, 8권 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김일성 본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책들이 간행되던 1990년대초에는 김일성은 이미 노쇠하여 이런 방대한 책을 쓸 형편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이미 간행된 각종 김일성 전기와 여러 문헌들을 조사 연구하여 대필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대부분 조작된 것이며, 회고록이라기보다 정치선전물에 가깝다.

회고록 편찬에 직접 간여하기도 했던 황장엽은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후 저서 「북한의 진실과 허위 (시대정신, 2006)」에서 당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3]

혁명전통을 과장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데서 김정일은 큰 공로를 세웠다. 그는 항일 무장투쟁을 주제로 하는 많은 소설과 영화를 만들어 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임춘추를 비롯한 항일 빨치산들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회수해버렸다. 그것은 빨치산 참가자들이 아무리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회상기를 쓴다하여도 실수하여 때때로 진실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아니라 소설가들이 생각해낸 허구가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게끔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문학작품들은 그것을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김정일 노작’과 같은 권위를 부여하였으며 당 조직을 통하여 전국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다 읽도록 하였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영화에 나온 사실들을 모든 사람들이 역사적 사실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기초하여 『세기와 더불어』라는 김일성의 회고록이 나오게 되었다.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한 소설과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들은 다 중앙당 선전부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선전부는 자기들이 김일성의 회고 록을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역사연구소는 회고록을 쓰는 것은 당역사연구소의 과업이라 하면서 이 사업을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당역사연구소가 김일성 회고록 집필을 주관하게 되고 선전부가 작가들을 동원해 주기로 하였다. 실제로 회고록을 집필한 것은 작가들이었으며 역사연구소의 일꾼들은 1, 2명 참가하여 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 사업은 김일성을 우상화하고 혁명전통을 과장하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같이 우상화 선전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회고록을 믿지 않았지만 일반대중들은 소설에서 읽고 영화에서 본 사건들이 재미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회고록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역사연구소에서는 이런 성과에 고무되어 만세를 불렀으며 항일 빨치산투쟁시기뿐 아니라 해방 후 시기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회고록 출판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자 회고록 출판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단호하게 회고록 출판사업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회고록을 문학전문가들이 너무 재미나게 썼기 때문에 사람들이 본인이 직접 쓴 것이 아니라는 의심을 품을 수 있었는데 죽은 다음에도 그런 투로 회고록을 발표하게 되면 이전에 출판한 것까지도 사람들이 믿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고록 속편을 만들어 김정일에게 올렸는데 그는 아주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회고록 출판사업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위조가 과연 효과를 낼 수 있겠는가? 이들은 역사는 결국 사실대로 밝혀지게 마련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순호는 저서에서 김일성 회고록의 내용을 검증없이 사실인 것처럼 인용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넬슨 벨 선교사의 김일성 부모 결혼 중매는 사실인가?

저자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 목사의 장인 넬슨 벨(L. Nelson Bell, 1894~1973) 선교사가 평양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김일성 부모 김형직(金亨稷, 1894~1926)강반석(康盤石, 1892~1932)의 중매를 섰다고 주장한다. 또한 벨 선교사가 원래 강신희이던 김일성 모친의 이름을 베드로를 뜻하는 반석으로 개명해주었다고 말한다.[4] 이 책을 본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이미 많이 퍼뜨리고 있지만[5][6] 사실이 아니다.

넬슨 벨 선교사는 김형직과 동갑으로 미국서 학교를 마친 후 김일성이 출생한 1912년보다 4년 뒤인 1916년에 처음 중국으로 와서 상해에서 북쪽으로 500 km 가량 떨어진 청강포(清江浦)에서 선교활동을 했을 뿐 평양에서 선교를 한 적은 없다. 나중에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부인이 된 딸을 평양의 외국인 학교에 보내 공부하게 한 것이 북한과 연고의 전부이다. 그레이엄 목사가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난 것도 부인의 평양 연고 때문이며, 장인 벨 선교사는 북한이나 김일성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다.

이런 사실은 인터넷에서 Nelson Bell로 한번만 검색해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이 정도 확인도 안 하고 잘못된 주장을 내놓고 이를 퍼뜨리는지 모를 일이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김일성 생전인 1992년과 1994년 평양을 방문했는데, 부인 루스 벨은 병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김일성 사망 후인 1997년에 자녀들과 60년만에 평양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손정도 목사 외손녀 문성자 증언의 문제점

저자가 뉴욕에서 소년시절 김일성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외손녀 문성자를 만나서 들은 증언은 어린 시절 김일성을 직접 알았던 모친 손인실의 증언과 전혀 다르다.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은 모녀간에도 그대로 잘 전달이 안 된다는 생생한 사례이다. 본인의 후일 증언도 정확하지 않을 수 있는데, 본인 아닌 유족들의 증언은 더욱 믿기가 어렵다.

  •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 p.101
미국 뉴욕에 살고 있는 손인실의 딸 문성자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김성주에 대하여 어머니에게 물어봤는데 어렸을 때 그런 사람을 본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그때 오빠 또래의 학생들이 우리 집에 많이 놀러왔었는데 만약 김성주가 어머니를 알고 있었다면 아마 김성주 역시 그때의 학생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딸 손인실(孫仁實, 1917-1999)의 증언
南北(남북)의 對話(대화) <44>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3) 1972.01.20 동아일보 4면
▲손인실(孫仁實)씨(五四(오사)·이대부총장(梨大副總長) 문병기(文炳基) 박사 부인)
임정(臨政)에 관계하시던 아버님(손정도(孫貞道)목사,·상해임정임시의정원의장(上海臨政臨時議政院議長))이 만주(滿州) 길림(吉林)에 한인학교(韓人學校)와 교회(教會)를 세우고 우리 가족들이 거기에 살 때였읍니다. 열살도 못됐던 나는 무슨 소년단인가 하는 대원들을 따라서 길림(吉林) 북산(山)에 올라 병정놀이나 숨바꼭질등 게임을 했던것이 지금도 기억(記憶)에 남아있읍니다. 그때 이 소년단에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었읍니다. 열두살 되던 一九二八(일구이팔)년경 길림(吉林)을 떠났기 때문에 그후 이 소년단의 일은 차차 잊혀졌는데 해방 후 만포진의 병원을 팔고 평양(平壤)에 와서 얼마 안된 때입니다. 아마 四五(사오)년十(십)월 하순쯤 일까요. 아이를 업고 평양(平壤) 거리를 걷고 있는데 무슨 공산당(共産黨) 사무실인가 어디에 김일성(金日成)의 큼직한 사진이 걸려 있는걸 보았읍니다. 그무렵 사람들 사이에서는 김일성(金日成)이가 진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개명(改名)을 해서 들어왔으며 만주(滿州) 길림(吉林)에서도 산 일이 있다는걸 들어왔었는데 그 사진을 보니 옛날 길림(吉林)의 「그 소년」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어렸을적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 듯 했으나, 그때도 살이 약간 찌기 시작해서 호리호리했던 옛날과는 달라 확실한 판단이 안됐지만 그가 어릴 때 보았던 김성주(金成柱)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고동뢰 소대장 피살 사건 증언의 문제점

아래를 참고하라.

항일연군 1로군 6사장은 북한 김일성이 맞는가?

유순호는 보천보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동일인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으나, 많은 과거 사료들이 전산화된 후 검색으로 발견된 많은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하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으며, 당시 나이는 35~36세 가량,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혜산진)으로 나온다. 후일의 증언이 수많은 당시 기록을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검증이 필요하다.

당시의 기록보다는 후일의 증언이 잘못될 소지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둔필승총(鈍筆勝聰), 즉 "우둔한 글솜씨로라도 남긴 기록이 총명한 기억력보다 낫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보천보사건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보천보사건을 기록한 당시 문헌은 수도없이 많지만, 모두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등이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유순호는 김일성은 보천보에 오지도 않았고, 실제 지휘한 사람은 6사 참모장 왕작주(王作舟)라고 말한다. 당시의 모든 기록에 반하는 이런 말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6사의 참모장이 나오는 당시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고, 왕작주(王作舟)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1941년의 혜산사건 판결서에는 6사 참모장이 허모(許某)로 나온다.[7][8]

각주

  1. [새책 출간] 보도자료 (뉴욕조선족통신)
  2. 세기와 더불어 위키백과
  3.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본문 中 4. 전대미문의 역사 왜곡 (시대정신, 2006.04.15.) pp. 43~46.
  4.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년) pp.30~31
  5. 미 선교사 중매로 태어난 김일성 주성하-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RFA 2017-02-03
  6. 김일성의 부모 중매인 미국선교사 넬슨 벨 리버티코리아포스트 2019.10.22
  7. (단독)조작된 신화 보천보 전투 아시아 투데이 2015-03-16
  8. 「惠山事件 判決書」(金正柱 編,≪朝鮮統治史料≫6, 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543∼841쪽.
    「惠山事件 判決書」 : 日帝暗黑期統治史料集 6권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0) pp.543~8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