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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정부
金鼎富
김정부.jpg
김정부(金鼎富, 1864 ~ ?)와 잡지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의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일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에 실린 것이다. 《삼천리》의 회견기사에 나오는 김일성보천보 사건의 주역인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장으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지만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맞는 것처럼 조작해 놓았다.[1]
기본 정보
성별
남성
출생일
1864년 )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義州)
사망일
미상(?)
사망지
미상(?)

김정부(金鼎富, 1864 ~ ?)는 평북 의주(義州) 출신으로, 1910년 무렵 만주 장백현(長白縣)으로 이주했고, 중국 당국으로부터 많은 땅을 얻어 개간하여 지주가 되었다.[2][3] 1920년대에 만주 장백현 19도구(十九道溝)에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4][5] 제5지단 지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했고, 이후 같은 지역에서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1936년 8월 31일 동북항일연군김일성 부대에 납치되어 갔다가 이듬해 1937년 3월 3일 구출되었다.[6] 장백현 19도구 마을은 김일성 부대에 자주 약탈을 당했고, 그가 운영하던 종산학교도 그가 납치되어 있던 기간인 1937년 1월 25일 김일성 부대의 방화로 소실되었다.[7][8][9] 그는 양민에 대한 약탈과 납치, 방화, 살인을 자행하던 동북항일연군 김일성 부대의 최대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그를 납치하고 괴롭히던 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 5권의 "애국지주 김정부"에는 자신은 김정부와 별 관계가 없었음에도 그가 마치 자신의 일에 동조해서 자발적으로 많은 지원을 해 준 것으로 조작해 놓았다.[1] 동북항일연군의 수많은 약탈행위들을 양민들이 자원해서 자신들을 도운 것으로 둔갑시켜 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 이주 및 지주가 되기까지

그는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10년경 만주의 장백현(長白縣) 일대로 이주했다. 조선인은 땅을 소유할 수 없어 1911년 중국에 귀화했으며 중국 당국으로부터 많은 땅을 얻어 힘들여 개간하여 큰 지주가 되었다. 장백현 지역은 청나라 시절 오랜 기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미개발 지역으로 남아 있었고, 장백부(長白府)가 설치된 것도 1908년의 일이라[10] 비교적 일찍 이주한 김정부는 쉽게 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백부(長白府)는 1913년에 장백현(長白縣)이 되었다.[10] 그의 땅에 조선인들이 많이 들어와 소작을 했으며,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 칭송을 받았다. 아래 동아일보 기사에 그 내력이 자세히 나온다.

장백(長白)의 평화촌(平和村) 경양포 답사기(景陽浦 踏查記) (下) 1933.11.03 동아일보 조간 5면 (김정부가 70 고령이라 함.)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가 살았던 만주 장백현 십구도구 제양포(中國 長白縣 十九道溝 濟陽浦)의 이름은 중국식으로는 상관방자(上官房子)이나, 제양포(濟陽浦), 계양동(桂陽洞), 계양촌(桂陽村), 경양포(景陽浦)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조선식 이름 "지양개"로 나온다.[1]

지도 왼편 하단에 혜산진(惠山鎭)이 있고, 압록강 맞은 편 약간 오른 쪽에 장백부(長白府)가 있다. 그 오른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조금 북상하면 19도구(十九道溝)의 제양포(濟陽浦)가 나온다. 19도구(十九道溝)는 29도구(卄九道溝)로 잘못 적혀 있다. [스물 입: 卄 = 廿]

독립운동 경력

여기의 김정부(金正富)는 한자가 다르나 동일인인 듯함.
이 때는 청나라가 망한 직후이고, 러시아 공산혁명 이전이므로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조직으로 보임.
  • 1921년 11월 30일 : 장백현 19도구 소제양동(長白縣 十九道溝 小濟陽洞) 소재 군비단(軍備團) 장백부(長白府) 구역구장 및 모집원(區域區長及募集員)으로 활동.[13]
김정보(金正甫) : 평남, 51세 - 이름이 약간 다르나 동일인으로 보임.
  • 1922년 01월 16일 : 장백현 19도구 소암리(巢岩里) 소재 군비단(軍備團) 제5지단의 지단장.[14]
김정부(金鼎富, 50세)
  • 1925년 04월 15일 :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15][16] 남부 부장(南部 部長)[17]
김정부(金鼎富) : 평북출신, 52세, 19도구 계양동(桂陽洞)
김정부 아래에 광정단 남부 총무(南部 總務)로 나오는 최광수(崔光洙, 1884 ~ ?)는 독립유공자로 201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나[18][19], 상급자 김정부에게는 지금까지 아무런 서훈이 없다.
  • 1926년 9월 : 중국이주동포 조선시찰단의 일원으로 조선 각지를 시찰.[20]

종산학교(宗山學校) 설립과 마적단(馬賊團)의 연이은 내습(來襲)

이후 김정부(金鼎富)는 고령으로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 종산학교(宗山學校)를 설립하고 운영하지만, 잦은 마적단의 침입으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약탈과 납치를 당하는 등 계속 수난을 겪는다.

작년(1927년)에도 김정부와 그 손자가 마적에 납치당했다고 함.
동포 5명(同胞 五名)을 마적(馬賊)이 납거(拉去)

마적 세명이 동포를 잡아가
불안(不安)한 장백현 동포(長白縣 同胞)

팔월이십사일 정오경에 중국 장백현 십구도구 계양촌(中國 長白縣 十九道溝 桂陽村)에 마적 세명이 돌연히 나타나서 종산학교(宗山學校)에 재학중인 김만춘(金萬春) (一六) 박동국(朴東國) 박병섭(朴秉燮)과 그곳에서 농업을 경영하고 있는 리달준( 李達俊) 김모(金某) 등 다섯 동포를 잡어서 장총(長統)을 견우고 만일 도망하면 곳 총살하리라고 위협함으로 비록 마적은 세명이나 잘못하다가는 생명이 위험하겠다하야 할수업시 공손히 잡히어간바 이 계양촌으로 말하면 동포 사십여호가 잇는 순조선 사람의 부락인바 그곳 디주(地主)인 김뎡부(金鼎富)씨가 그 부근 몃백 뎡보(町步)를 중국의 당국으로부터 어더가지고 한 디주가 되어 상당한 수입도 있는 터인바 작년에도 이와가티 마적이 칩입하야 디주 김씨와 그의 손자를 잡어가서 결국 삼천여원의 돈을 밧고 돌우노흔 일도 잇다는바 이번도 그와가튼 의미로 전례를 엿보고 침입한 것이라는데 아즉 다섯동포의 소식은 막연하다더라. 【혜산진】
동포 4명 생환(同胞 四名 生還) 1933.06.13 동아일보 2면
김정부의 아들 김만두(金萬斗, 35세) 등이 마적에 납치당했다가 생환함.
마적이 조선인 지주 김정부(金鼎富)에게 아편 열개와 현급 백원을 요구하고 그외 동리 여러 집에서 아편 이십개와 현금 백원을 오는 구월 사일 이내로 납부하라고 명령.
김정부(金鼎富, 69세, 평북 의주 출생)씨가 20여년전 장백으로 와서 땅을 개간하며 큰 재산을 일구어 마을 사람들의 경조사에 큰 도움을 주고 있음. 사재 100원을 출연하여 장백현내 각 조선인 학교 학생들을 초청하여 육상경기대회 개최.

6사장 김일성(金日成) 부대에 의한 수난

김일성 부대가 김정부 등을 납치하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한다는 경성일보(京城日報) 1936年 9月 11日 조간 5면 기사.

1936년 8월경부터 김정부가 살던 장백현 19도구 인근 밀림 속에 동북항일연군 산하 김일성 부대가 근거지를 마련하고 주변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하고 방화하는 등의 일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김정부는 1936년 8월 31일 김일성 부대에 납치 당해 갇혀 있다 김일성 부대를 습격한 일만군(日滿軍)에 의해 1937년 3월 3일 구출된다. 그가 납치되어 있던 기간인 1937년 1월 25일에 김일성 부대는 김정부가 살던 마을을 약탈하고 방화하여 민가 10여호와 김정부가 설립한 종산학교가 소실된다.

이처럼 김정부나 마을 사람들은 김일성 부대에 지속적으로 약탈 당하고, 방화, 납치 등 일방적 피해를 당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일각에서 지주 김정부가 몰래 김일성 부대를 도왔다는 주장을 하지만 아래의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김정부를 납치하고, 주민들을 괴롭히던 주역은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으로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북한 김일성은 실제로는 김정부와 별 관계가 없음에도 김일성 회고록에는 자신이 6사장 김일성인 것처럼 말하며 당시 김정부가 자신들의 일을 많이 도와줬다면서 그를 "애국 지주"라고 칭찬하는 등 조작해 놓았다. 항일연군들이 한 약탈행위들을 미화하기 위해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인다.

김백성(金白成)은 김일성(金日成)의 오기
김일성(金日成) 비단(匪團) 200명 : 19도구 오지 (十九道溝 奧地)
손해액(損害額)이 삼만여원(三萬餘圓)의 거액(巨額) 함남대안(咸南對岸)의 공군행패(共軍行悖)
김일성 부대 40여명이 25일 오후 11시 19도구 관방자(官房子) 마을을 습격, 곡식 3백석을 빼앗고, 방화로 민가 10여호와 종산학교가 소실됨.
김일성 일파(金日成 一派)에게 만군 8명 피살(滿軍 八名 被殺) 23도구 제삼종점(廿三道溝 第三終點)서 1937.06.15 조선일보 2면
장백현 대안(長白縣 對岸)에서 전사자 추도식(戰死者 追悼式)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종산학교 설립자(宗山學校 設立者) 김정부씨(金鼎富氏) 담(談) 1937.06.23 동아일보 조간 5면
십구도구 오두강(十九道溝 五頭崗)에는 김일성 공비(金日成 共匪)가 습래(襲來) 주민 11명(住民 十一名)을 납거(拉去)
십구도구(十九道溝)에 출현(出現), 십수명 납거(十數名 拉去)
현공서(縣公署)에서 육개촌 지적(六個村 指摘)하여 집단촌(集團村)으로 부흥공작(復興工作)
김정부가 사는 마을 십구도구(十九道溝) 상관방자(上官房子)에서만 1년 사이 100여호의 가옥이 소실됨.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양일천(梁一泉) 기자가 작성한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실린 아래 2건의 기사에는 김일성 부대에 납치당한 김정부가 1936년 12월 6일 김일성을 회견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나온다. 김일성 회고록 5권의 "애국지주 김정부"에 나오는 김일성이 부하가 납치해왔다는 김정부와 나눈 대화와는 전혀 다르며, 김일성 회고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이다. 보통 《삼천리(三千里)》 1937년 10월호의 기사만 알려져 있고, 1938년 11월호에 나오는 후속편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김일성 회고록 편집자가 이를 보지 못하고 엉터리로 조작한 것같다.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김일성 회고록의 김정부 관련 기록은 조작

위의 김일성 회견기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의 "애국지주 김정부"에 나오는 지주 김정부와 관련된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김일성 회고록이 조작된 것을 알 수 있다.[1] 김정부를 납치하고 종산학교를 불태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 다른 사람이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김정부가 그의 부친 김형직(金亨稷, 1894~ 1926)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나오지만, 이는 지어낸 말에 불과하다. 김정부는 1864년생으로 김형직보다 30세나 연상이며, 김일성의 조부 김보현(金輔鉉, 1871~1955)보다도 나이가 7세가 많다. 김형직은 1920년대 초 장백현 8도구에 잠간 살았지만 김정부가 살던 장백현 19도구와는 상당히 떨어진 곳이라 두 사람은 일면식도 있기 어렵고, 나이 차이도 너무 커서 가깝게 지낼만한 사이도 아니다.

지도 보기

  • 장백현 19도구(長白縣 十九道溝)
중국 지린성 바이산시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白山市长白朝鲜族自治县) Shijiudaogou He(十九道沟河) 구글지도
Shijiudaogoucun(十九道沟村) Mapcarta : 장백현 19도구촌(長白縣 十九道溝村)
  • 장백현 20도구(長白縣 二十道溝)
중국 지린성 바이산시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白山市长白朝鲜族自治县) Ershidaogoucun(二十道沟村) 구글지도
  • 장백현 8도구(長白縣 八道溝)
중국 지린성 바이산시 창바이 조선족 자치현(白山市长白朝鲜族自治县) Badaogouzhen(八道沟镇) 구글지도
김형직이 잠간 살았던 곳으로 오늘날 양강도 김형직군 김형직읍의 압록강 맞은편 중국쪽 대안이다. 김정부가 살았던 장백현 19도구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아래는 동아일보 혜산진 지국 양일천 기자가 장백현 19도구와 20도구를 찾았던 기사로 당시의 사정을 기록했다.

白頭山(백두산) 넘어 同胞(동포)들을 차저서 (四) 1932.03.25 동아일보 6면 : 양일천(梁一泉) 기자

함께 보기

각주

  1. 1.0 1.1 1.2 1.3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항일 혁명 5편, 1994년 출간) 제13장 백두산으로 6. 애국지주 김정부
  2. 個人(개인)의 出金(출금)으로 陸上競技會開催(육상경기회개최) 1933.10.05 조선일보 4면 : 김정부(金鼎富, 69세, 평북 의주 출생)
  3.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國境의 匪賊首魁 金日成 會見記)』 《삼천리(三千里) 제9권 제5호》 (1937년 10월 01일) : 김정부(金鼎富, 73세)
  4.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제4장 대한독립군비단(軍備團)과 제 단체
  6.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347~348.
  7. 일야양처(一夜兩處)를 습격(襲擊)코 민가 백여호 소각(民家 百餘戶 燒却) 1937.01.31 조선일보 석간 7면
  8. 병화(兵禍)로 교사소실(校舍燒失) 수백 아동 도중방황(數百 兒童 道中彷徨) 동아일보 1937-06-23 조간 5면
  9. 종산학교 설립자(宗山學校 設立者) 김정부씨(金鼎富氏) 담(談) 1937.06.23 동아일보 조간 5면
  10. 10.0 10.1 长白朝鲜族自治县 维基百科
  1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 > 中國 長白 縣內 朝鮮人團體 組織에 관한 건 朝鮮駐箚憲兵隊司令部 1913년 11월 27일 : p.19 김정부(金正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권 中國東北地域篇 I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 支那長白縣內朝鮮人團體組織ニ關スル件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 > 朝鮮人團體 組織에 관한 明石憲兵司令官의 報告寫本 送付의 건 落合謙太郞(봉천총영사) 1913년 12월 01일 : p.19 김정부(金正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9권 中國東北地域篇 I > 中國東北地域民族運動 > 朝鮮人團體組織ニ關シ明石憲兵司令官ノ報告寫送附ノ件
  13. 大正8年乃至同10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2 > 國外情報 : 軍備總團役員의 改選과 同支團의 異動 朝鮮總督府 警務局 高等警察課 1921년 11월 30일 : p.6 長白縣 十九道溝 小濟陽洞 金正甫(區域區長及募集員)
  14.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1 > 長白縣下 不逞團의 系統的 調査 關東廳警務局 1922년 01월 16일 : p.6 金鼎富.(50세)
  15. 광정단(匡正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6. 광정단 - 세계한민족문화대전
  17.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1 > 南北滿洲一帶에 있어서 不逞鮮人團 調査의 件 西澤義微(安東領事) 1925년 04월 15일 : p.17 김정부(金鼎富) : 평북출신, 52세
  18. 최광수(崔光洙)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정보 / 독립유공자 공훈록
  19. 최광수(崔光洙, 1884 ~ ?)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정보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20. 支那移住同胞 朝鮮視察團 매일신보(每日申報) 1926-09-28 2면 2단
  21. 강덕상(姜徳相) 편, 『現代史資料 (30) 朝鮮 (6) 共産主義 運動 (2)』(東京 みすず書房, 1976) pp.347~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