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金惠順 | |
기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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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17년 |
사망일 |
미상(?) |
김혜순(金惠順, 1917~ ?)은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 김일성의 처로,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김일성과 헤어지게 되었다[3]. 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북한에서 살았다.[4][5] 1994년 김일성 사망 때까지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6][7]
개요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김일성의 처로 1940년 가을 소련으로 도주하기 직전 결혼한 김정일의 생모 김정숙과, 김정숙 사후에 재혼한 김성애 두 사람만 인정한다. 김일성 생전에는 공개활동을 활발히 하기도 했던 김성애마저 김일성 사후에는 김정일에 의해 그 존재가 지워지고, 지금은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만 있는 것처럼 선전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의 만주 빨치산 시절 김정숙 이전에 거쳐간 여자도 많고,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후에도 여자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문란했다. 6.25 전쟁 중에 체포된 김일성의 전속 간호사 조옥희(趙玉姬)는 김일성이 매독(梅毒)에 걸려 606호 주사[8]를 맞는 것을 10여 차례 보았다고 증언했다.[9] 당시 조옥희(趙玉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1920~1956) 특무부대장의 구술 회고록 『숙명의 하이라루(海拉爾)』 (청미디어, 2022)[10]에는 김일성의 난잡한 여자 관계에 대한 구체적 진술이 무수히 많이 나온다. 이 많은 여자들 중 누구를 처로 보고, 누구를 그냥 잠간 스쳐 지나간 여자로 볼지도 구분하기 어렵다.
만주 빨치산 시절 비교적 오래 김일성과 관계를 맺었던 여자로 처음에는 한성희가 있었고, 두번째가 김혜순이다. 한성희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후일 증언만 있을 뿐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없으나, 김혜순의 존재는 기록으로도 확인이 된다. 일본군 문서에 김혜순은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 아래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으로 나온다.[11]
김일성 회고록의 김혜순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아래와 같이 4권과 5권 두 곳에 김혜순에 대한 이야기가 간단히 나오지만 그녀가 자신의 아내였다는 말은 없다.
맨먼저 찾아든 것이 대첨창골짜기에 숨어있었다는 화룡출신의 반일자위대원들이었다. 그 사람들속에 후날 사령부 전령병으로 된 백학림과 꾀꼬리로 소문난 김혜순이도 끼여있었다.
박록금(본명 박영희)이 우리를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는 새사단 안에 잠정적으로 존재했던 첫 여성중대의 중대장이 되었다.아래는 가극 《피바다》의 초연무대 연습 당시의 일에 대한 언급이다. 김혜순이 여주인공 역을 맡았다고 한다. 이 대목에 위의 김혜순 사진도 함께 나온다.
그가 자기의 기량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매번 지적을 받곤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에 학비가 없어 학교에도 온전히 다니지 못하고 학교 울타리 밖에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글과 노래를 배운 여성이었다. 나는 김혜순에게 그가 조국과 간도에서 실지로 체험한 일들을 하나하나 상기시켜 주면서 이 연극은 바로 동무같은 사람들이 겪은 생활을 엮은 것이다. 왜놈들이 쏴죽인 을남이는 동무의 친동생이다. 생각해보라, 방금전까지 누나, 누나 하던 동생이 무참히 쓰러졌는데 왜 누나의 가슴에서 원한의 피눈물이 흐르지 않겠는가고 말해주었다.
김혜순의 연기는 그 순간부터 일변되었다.일본군에 체포되어 귀순
19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는 김일성의 처 김혜순(22세)이 4월 초에 체포되어 귀순, 전향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그녀를 간호하던 박정숙(朴貞淑, 24세)도 같이 체포되었다.
1941년 3월에 노조에 토벌대가 작성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11].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왼편에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이 나온다. 김혜순 이름에 X 표시가 된 것은 그녀가 이미 토벌되었다는(투항했다는) 표시이다. 아직 토벌되지 않은 김일성 이름에는 X 표시가 없다. 그는 1940년 10월 23일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이 기사에 당시활동하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가 김혜순으로 나오는 것을 들어 이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12] 당시는 북한 김일성의 처로 김정숙과 김성애 외에는 달리 알려진 사람이 없었으므로 오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위 기사에 의하면 체포된 김혜순은 자신이 13살 때 1930년 5.30 간도 폭동이 일어나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김일성을 만났고, 그가 자신을 데리고 가서 보살펴 주어 같이 살게 된 것처럼 주장했다. 실제로 간도폭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한명으로 김일성(金一星)이 있고, 그에 대한 재판 기록도 남아 있는데,[13][14][15][16] 그는 감옥을 탈출하여 소련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북한 김일성은 간도폭동에 간여한 적이 없으므로 이 또한 이명영이 김혜순의 남편 김일성을 다른 사람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말은 김혜순이 허위로 진술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혜순은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소장[17]이 지휘하는 노조에 토벌대 산하 나가시마(長島玉次郞) 공작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명영이 1971년 2월 일본으로 당시의 공작대장 나가시마 다마지로 (長島玉次郞) 조장(曹長)[18]을 찾아가서 들은 증언에 의하면 김혜순은 귀순 후 한 때 자신을 체포한 나가시마의 집에서 같이 살며, 나가시마의 처와도 친해졌다고 한다.[19][20]
나가시마는 귀순한 김혜순을 이용하여 김일성을 귀순시키려는 공작을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다고 하였다. 아래는 김혜순과 관련한 나가시마의 후일 증언이다.[19]
나가시마는 또 자기들 내외는 가끔 김혜순(金惠順)의 이야기를 한다고도 했다.[24]
나가시마 공작대가 입수한 사진속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란 인물은 북한도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지만 명백히 북한 김일성이 아니다. 이것 또한 이명영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판단한 주요 근거였다. 아마도 당시 귀순 또는 체포된 항일연군 인물들이 안경 낀 사람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이라고 지목한 것은 고의적으로 속인 것이 아닌가 한다.
많은 자료가 새로 발굴된 지금의 판단으로는 김혜순은 북한 김일성의 처가 맞고, 그 남편이었던 제2방면 군장도 북한 김일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혜순을 동원한 김일성 귀순 공작도 별 효과가 없자 그 후 김혜순은 적당한 때에 풀려나서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혜순과 헤어지게 된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며, 소련으로 월경하기 직전에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한다.
노조에 토벌대 사령관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소장[17].
1940년 4월 초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을 체포했던 나가시마 다마지로(長島玉次郞) 조장(曹長)의 1971년 2월 사진.
김일성 부대에 잠입한 첩자 지순옥의 보고
만주국 간도성 경무청(間島省 警務廳)은 1939년 8월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에 김일성의 부하 강흥석(姜興錫)의 처 지순옥(池順玉)을 첩자로 들여보냈는데 1940년 6월 말에 돌아나와 보고한 내용에 여자 대원으로 주임(主任) 김희순(金熙順, 29세)과 박정숙(朴貞淑, 25세)이 나온다. 나이는 맞지 않지만 주임 김희순(金熙順)은 여자청년부장(女子靑年部長) 김혜순(金惠順)으로 보이고, 박정숙(朴貞淑)은 김혜순과 함께 체포된 사람인 것이 틀림없다. 지순옥은 1940년 6월에 김일성 부대를 나왔으나 4월에 김혜순과 박정숙이 체포된 사실은 몰랐던 것같다. 지순옥은 옮겨가는 김일성 부대를 따라갔고, 김혜순은 부상으로 따라가지 못하고 박정숙과 함께 남아있다 체포된 탓으로 보인다.
아래 훈춘 영사(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의 1940년 7월 26일자 보고서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강덕(康德) 7년 = 소화(昭和) 15년 = 1940년. 강덕(康德)은 만주국 연호임.
- 標題:7 昭和15年7月5日から昭和15年7月26日
-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 在琿春 領事 키우치 타다오(木内忠雄)가 在満洲国 特命全権大使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 1882~1949)에게 올린 보고서
-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次郎)는 당시 관동군사령관 겸 주만주국대사(関東軍司令官兼駐満洲国大使)였다.
- pp.33~43 : [琿領情機密 第一八六號] 金日成匪團ノ內部狀況ニ關スル件 : 1940-07-26
장해성과 문명자의 김혜순 인터뷰 기사
탈북자 장해성은 1980년대 중반 평양에서 김혜순을 인터뷰했던 일을 정리하여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WayBack Machine Backup Page]
-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김혜순은 자신이 붙잡히게 된 것이 김일성 부대의 참모장이었던 임수산(林水山)이 변절하여 일본군을 밀영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인 것 같다. 김혜순이 체포된 것이 1940년 4월 초인데, 참모장 임수산이 귀순한 것도 같은 시기인 것이 확인된다.[25]
김혜순은 장해성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일본군에 잡혀 귀순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적당한 기회를 봐서 도망쳐 나와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게된 것처럼 주장한다. 자신의 과거 치부를 굳이 사실대로 말해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위 증언의 내용은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고, 일부는 사실이고 일부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 것도 있을 것이다.
또 재미 언론인이었던 문명자(1930 ~ 2008)는 김일성이 사망한 직후인 1994년 7월 2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김혜순과 박정숙을 인터뷰한 기사를 쓴 바 있다. 여기에는 당시 찍은 김혜순과 박정숙의 사진도 나온다.
-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일본 패전 후 북한이나 만주에서는 항일연군 출신자들이 권력 실세가 되어 일제에 체포되거나 투항하여 변절한 항일연군 인물들을 색출하여 처형했다. 김혜순이 일제에 귀순하고도 처형을 모면한 것은 그녀가 김일성의 전처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체포되는데는 김일성의 책임도 있었다.
한성희와 김혜순을 동일인으로 혼동
브루스 커밍스의 김혜순에 대한 엉터리 주장
브루스 커밍스는 김혜순이나 김석원(金錫源, 1893 ~ 1978)과 관련해 말도 안되는 엉터리 주장들을 자주 한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이런 주장을 버젓이 내놓는 사람을 한국의 좌파들이 대학자인 양 떠받드는 꼴이 우습다. 김일성의 처였던 김혜순은 19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됐지만 얼마 후 풀려나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김일성 사망 후인 1994년 7월까지도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김석원은 해방 전에는 북한 김일성과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인데, 북한이 간삼봉 전투의 일본 측 지휘관 김인욱(金仁旭)을 김석원으로 잘못 알고 비방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따라서 인용하며 같이 비방하는 것이 커밍스의 연구 수준이다.
커밍스는 그의 저서 ‘North Korea, Another Country’ 115쪽에서 북한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이 김혜순이며, 일본군에 체포돼 죽었다고 썼다.[26]
- Bruce Cumings, 《North Korea, Another Country》, (The New Press, New York, 2004) p.115
-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김정일 코드 : 브루스 커밍스의 북한》, (따뜻한손, 2005) pp.38~39
김석원은 제국군대의 "김일성 특별체포대" 책임자인 노조에 쇼토쿠 장군에게 상황을 보고했는데, 가네야마 샤쿠겐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가 거둔 가장 큰 업적은 1940년 유명한 중국 게릴라 두목이자 김일성의 절친한 동지인 양진규[27]를 살해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노조에 군대는 김일성의 첫 번째 부인으로 여겨지던 김혜순을 체포하여 숨어 있던 김일성을 유인하는 데 이용하려다 실패하자, 김혜순을 살해했다.20
- 20. Kim Se-jin, The Politic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3) 48-57쪽. 이승만은 1948년에 권력을 잡은 후 진압 경험이 있는 만주출신 장교를 신임하게 되었다. 1950년대 말까지 이러한 정책을 계속하였다. 그 이유는 여전히 횡행하는 남한의 강도와 아직 남아있는 게릴라를 진압하는데 이들의 활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커밍스는 김인욱을 김석원으로 바꿔치기하여 그를 비난하는 것도 모자라서 추가적인 조작까지 하고 있다. 1937년 간삼봉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 김인욱과 맞섰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하고 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사람이지만, 1939년~1941년간에 노조에(野副) 토벌대가 추적하던 제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하지만 김석원은 노조에 토벌대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 부대 산하에 배속된 적도 없다.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는 김석원이 아니라 1938년 6월말 일본군에 투항한 후 이들에 협력한 자신의 부하 1사장 정빈(程斌) 등에게 쫓기다 1940년 2월 사살되었다. 커밍스가 자주 인용한 서대숙도 양정우는 변절한 부하 정빈(程斌)의 안내를 받은 일본 경찰부대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했지[28] 김석원이 죽였다고 하지는 않았다.
김석원은 또한 노조에 토벌대에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과도 당연히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말은 커밍스가 제멋대로 지어낸 허위사실이니 당연히 아무 근거문헌도 제시하지 못했다. 제시된 유일한 근거문헌인 김세진의 책에는[29] 노조에 토벌대나 양정우, 김혜순에 관한 말 어느 것도 나오지 않으며, 커밍스 외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김혜순은 당시 살해된 것이 아니라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을 때도 평양에 생존해 있었다. 토벌대 사령관의 이름 野副昌德은 "노조에 쇼토쿠"가 아니라 "노조에 마사노리(のぞえ まさのり)"로 읽어야 한다.[30]
커밍스는 또한 위와 유사한 허위 주장을 여러 곳에서 되풀이하고 있다.
- Bruce Cumings, A Murderous History of Korea Canadian Dimension September 7, 2017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한국전쟁에 대한) 주장이 옳았다고 본다. 김대중은 ‘김일성이 50년대에 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먼저 한국, 그 다음 일본 식의 세계 공산화 전략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에 관한 논란
- 빨치산서 수령변신「세계최장(最長) 독재자」 1994.07.10 조선일보 10면
- 북한 김일성의 사망 직후 그의 항일투쟁의 실체에 대해 이명영과 서대숙이 제시한 상반되는 의견을 싣고 있다. 이명영은 체포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처 김혜순을 들어 그가 북한 김일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당시는 김정숙 이전 김일성의 처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김혜순이 북한 김일성의 전처로 확인된다.
- 변장(變裝)한 여기자(女記者) 암야행로(暗夜行路) 1975.03.05 조선일보 12면
당시 기사에 의하면 「김일성(金日成)」은 함남북 대안(咸南北 對岸)에 출몰하며 일제(日帝)의 국경(國境) 경비대를 괴롭히는「동북항일인민연합군(東北抗日人民聯合軍)」의 중견간부며 「변방녹림(邊方綠林)의 쾌걸」로 「너무나 유명」했다.
함남(咸南) 혜산(惠山)의 일제(日帝) 경비대는 40년 4월 초순 두만강 대안(對岸) 장백현(長白縣) 십오도구 군정동(軍程洞)과 삼포동(三浦洞)사이의 밀림지대 속의 한 숨겨진 산채를 습격했다. 산채에 있던 남자경비원 2명을 사살하고 끝까지 완강히 대항하는 20세 가량의 여자 2명을 사로잡았다.
신문끝에 그중 한 여자가「김일성이 오매불망하는 애처 김혜순(金惠順)(22)」임을, 또 한 사람은 김혜순(金惠順)의 간호원격인 박정숙(朴貞淑)(25)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무렵 김혜순(金惠順)은 산채에서 다리의 중상을 치료중이었다. 39년 5월 4일 김일성(金日成) 일파가 함남(咸南) 최후의 행동으로서 반절구(半截溝)를 대거 습격하던 때[33] 김혜순(金惠順)은 남편을 따라 무장하고 부하를 지휘하다가 경비대의 총탄을 맞았었다. 그후 김일성(金日成)은 함남(咸南) 대안(對岸)의 본거를 함북(咸北) 대안(對岸) 안도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하며,부득이 부상중인 김혜순(金惠順)을 3명의 호위병과 의술을 아는 박정숙(朴貞淑)을 붙여 우선 깊은 숲 산채속에 숨겨두고 갔었다.
김혜순(金惠順)은 13세때, 간도(間島) 폭동사건에 용정(龍井)에서 활동하던 김일성(金日成)에게 「길잃은 어여쁜 아가씨」로 발견되었다. 자라며 김일성(金日成)과 동서하게 되고, 직접 그의 지도를 받아 「무술기개가 남자를 억누를만큼」되어 있었다.
「애처(愛妻)가 본 김일성관(金日成觀)」에 의하면 그는『제일 남녀관계에 절대 엄밀하여서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엄벌에 처하며, 용의주도한 인간으로서 항상 5~6명의 호위를 데리고서 움직이는데 같은 부하로도 그 있는 곳을 아는 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의 김일성(金日成)이 실재한 어떤 인물인지, 또 당시 일제(日帝) 당국이 발표한 「김일성애처설(金日成愛妻說)」이 어느 정도의신빙성이 있는지는 고증할만한 충분한 자료가 없다. <이흥우기(李興雨記)>[34]함께 보기
각주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4권 제12장 광복의 새봄을 앞당겨 (1936년 3월 ~ 1936년 5월) 1. 새 사단의 탄생 : p.183
-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5권 제13장 백두산으로 (1936년 5월 ~ 1936년 8월) 3. 《피바다》의 초연무대 : p.36
- ↑ 金日成의 愛妻가 귀순 선무공작 제1선에 - 소설같은 전향의 경위 조선일보 1940년 07월 05일 석간 2면
- ↑ 장해성, 인간의 운명 : (김일성의 여자, 김정숙 그리고 김혜순의 이야기) NK-PEN 2014-06-28 : Archived 2018.11.06
- ↑ [생생토크 평양수다] 北, 크리스마스 어떻게 보내나? TV조선 2013. 12. 25 : 김일성 전처 김혜순에 대한 장해성의 이야기가 나옴.
- ↑ 김일성 가짜설#체포된 김일성의 처 김혜순(金惠順)의 후일담
- ↑ 7.0 7.1 문명자(1930 ~ 2008), 《항일무장투쟁 여전사 박정숙, 김혜순 인터뷰 : 나의 사령관 김일성 장군》 월간 말 1994년도 9월호(통권 99호), 1994.9, pp.46-48
- ↑ Salvarsan 또는 화합물 606호 (compound 606) : Arsphenamine
- ↑ 金日成(김일성)의 看護婦(간호부) 合同搜査本部(합동수사본부)서 逮捕(체포) : 부산일보 1951년 3월 1일자 2면
- ↑ 김일성 관련 자료 목록#조옥희를 조사한 김창룡(金昌龍) 특무부대장의 구술 회고록 : 우남위키
- ↑ 11.0 11.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13071220200、吉林、間島、通化三省治安粛正の大要 昭和14年10月~16年3月(防衛省防衛研究所)」 件名標題:第5 討伐成果 (C13071220200) : 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에 제2방면군 여자청년부장 김혜순이 있음.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302~303.
- ↑ 32. 간도농민폭동 - 연변일보 Oct 23, 2007
- ↑ 오늘의 역사: 간도와 간도 5-30 폭동 편 - 심재호 기자 - Radio Free Asia Apr 6, 2000
- ↑ "間島五卅事件予審終結す"에 나오는 김일성(金一星) 기록 『사상월보(思想月報)』제1권 제4호 (1931.07.15) p.205 (pdf p.24)
- ↑ 第四次間島共産黨事件判決(間島五卅事件) 사상월보 제2권 제4호 소화7년(1932) 7월 15일 p.100 (pdf p.43)
- ↑ 17.0 17.1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ja.wikipedia
노조에 마사노리(野副昌德, 1887~1981) World War 2 备忘录(비망록) - ↑ 조장(曹長)은 상사에 해당하는 하사관 계급이다. 나가시마는 많은 공을 세워 후일 장교로 진급했다.
- ↑ 19.0 19.1 19.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p.319~320
- ↑ (진위 김일성 열전 43) 2대 김일성의 정체(상)|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3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4) 2대 김일성의 정체(하)|이명영 집필(성대교수 정치학) 중앙일보 1974.07.25 종합 3면
(진위 김일성 열전 45) 입소 이후의 2대 김일성 중앙일보 1974.07.29 종합 3면
"'안경 낀 김일성'…보천보 업적 가로채려 사진 조작" 연합뉴스 2015/10/15 - ↑ 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第4篇/第9章 匪賊及住民(3) pp.1~2의 사진 맨 뒷줄 중앙의 모자 쓰고 안경낀 인물.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C13010013700、満洲に関する用兵的観察 第12巻 昭和27年(1952년)11月(防衛省防衛研究所)」
파일:제2방면군장 김일성.jpg : 사진 앞줄 중앙의 같은 인물. - ↑ 키타베 구니오(北部邦雄)는 노조에 토벌대의 간부로 계급은 중좌(중령)이었으며, 나가시마(長島) 조장(曹長)의 상관이었다. 北部邦雄은 한국에서 주로 "후쿠베 구니오"로 읽히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 ↑ 키타베(北部) : 일본 성씨
-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 그 傳說과 神話의 眞相糾明을 위한 硏究》 (新文化社, 1974) p.322
- ↑ 25.0 25.1 비수(匪首) 김일성 부대(金日成部隊)의 임참모장(林參謀長) 수귀순(遂歸順) -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05/07 3면 1단 : 참모장 임수산이 4월 초 귀순했다고 하였다.
- ↑ '진짜 김일성', 81년 전 전사…'북한 김일성'은 가짜 뉴데일리 2018-11-19
- ↑ 원문의 Yang Jingyu는 양진규가 아니라 Yang Jingyu(양징위)이며,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총사령 양정우(楊靖宇)의 중국어 발음이다.
- ↑ 서대숙 지음;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서울: 청계연구소, 1989) p.25
- ↑ Kim Se-jin, CNTS-00085606550 The Politic of Military Revolution in Korea (Chapel Hill :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73) 48-57쪽
- ↑ 野副昌德 (1887~1981) ja.wikipedia
- ↑ Kathryn Weathersby ICAS (Institute for Corean-American Studies)
- ↑ 실제로는 제2석간 아닌 제1석간에 실렸다.
- ↑ 함남대안(咸南對岸) "반절구(半截溝)"를 김일성비 대습격(金日成匪 大襲擊) 조선일보 1939.05.05 석간 2면
- ↑ 변장(變裝)한 여기자(女記者) 암야행로(暗夜行路) 조선일보 1975.03.05 조간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