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글 (→‎전개)
66번째 줄: 66번째 줄:
* [http://waks.aks.ac.kr/dir/searchAchieve.aspx?qType=0&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sType=&sWord=%ed%8f%89%ec%a0%95%ec%84%9c 레베데프의 북한 정권 요인에 대한 평정서]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 포털
* [http://waks.aks.ac.kr/dir/searchAchieve.aspx?qType=0&secType=%EA%B8%B0%ED%83%80%EC%9E%90%EB%A3%8C&sType=&sWord=%ed%8f%89%ec%a0%95%ec%84%9c 레베데프의 북한 정권 요인에 대한 평정서] 러시아문서보관소 소장 해방후 한국사회 관련 자료의 수집 번역 및 주해 (1945~1950) : 한국학진흥사업 성과 포털


북한 정권 출범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고, 소련군도 1948년말까지 철수한다. 하지만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가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을 맡아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또 비밀 경찰조직 [[특경부|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를 운영하며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북한 정권 출범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고, 소련군도 1948년말까지 철수한다. 하지만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가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또 비밀 경찰조직 [[특경부|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를 운영하며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평가==
==평가==

2020년 11월 29일 (일) 16:01 판

개요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38도선 이북의 지역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소련 군정을 실시하였다. 소련군 점령 후 수개월이 지나서부터는 조선인들의 인민위원회에 행정을 이양하고 소련군은 이를 감독하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하였으나 이를 소련이 조선인의 자치를 허용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직접 통치를 한 미군정에 비해 소련 군정은 그 형태가 간접적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미군정에 비해 훨씬 더 내정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 지령문에 나온대로 소련은 처음부터 북한에 단독의 공산국가를 수립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9월초에 스탈린은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에의 제88독립보병여단에서 5년간 자신들이 교육과 훈련을 시킨 진지첸 (김일성) 대위를 모스크바로 불러 면접시험을 본 후 북한 지도자로 결정하였다. 북한의 소련군정은 북한지역에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도 않고 아무 정치적 기반도 없던 김일성을 자신들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내세워 무수한 정치공작을 통해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했다. 이를 위해 조만식, 현준혁 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여러 정치 조직을 만들어서 김일성을 책임자로 앉혔다. 소련군정 시기는 토지개혁 등 북한 지역의 공산화와 소련의 대리인 김일성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주는 기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은 체제 선택권도, 지도자 선택권도 가질 수 없었고, 소련이 강제로 만들어준 공산체제와 김일성 지도자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소련군정 기간에 시행된 북한의 주요 정책이나 법안들은 모두 소련이 결정했고, 표면적으로는 김일성이 위원장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가 결정해서 시행하는 것처럼 포장했을 뿐이다. 북한 정권 공식 출범 당시에도 헌법 제정은 물론 초대내각의 인선까지 소련이 주도권을 행사했고, 그후로도 평양의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았으며, 특경부를 설치하여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을 감시했다.

반면에 미군정은 조선인 지도자를 표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대신 새로 출범하는 한국의 국가체제, 헌법, 지도자 등은 모두 한국인들이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했다.

해방 후 북한의 주권은 "일본천황 -> 소련군정 -> 김일성 -> 김일성 일족"으로 이전되어 왔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북한은 해방된 것이 아니라 압제자가 바뀌어 왔을 뿐이다. 오늘날 김일성 일족의 세습전제왕조 체제는 일제보다 훨씬더 폭압적이며, 전인민이 수령 한 사람만을 위해 살도록 강요 당하고 있는데, 이런 체제의 기원은 소련 군정에 있다. 반면에 한국의 주권은 "일본천황 -> 미군정 -> 한국 국민"으로 이전되어,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국민 주권의 국가가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전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은 1945년 8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점령을 완료한다. 25군 사령관은 이반 치스차코프 상장이었으나, 그는 야전 군인으로 정치문제에는 그다지 간여하지 않았다. 북한의 소련군정은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우수리스크에 사령부가 있는 연해주군관구 군사위원회가 총괄하게 되며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된다. 평양 현지에서는 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과 민정청 사령관 안드레이 로마넨코 소장 등이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아 이행하는 책임자였다. 북한 정권 출범 후 스티코프는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여전히 북한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방직전

해방직후

소련군은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를 열어 국내 사람들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소련군 88여단진지첸 대위를 전설적 항일영웅으로 알려진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대중들 앞에 처음으로 내세운다. 소련군 문서에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Цзин Жи-чэн 또는 Цзин Жи Чен, Jing Zhichen)으로 나오고,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1]
소련은 실질적으로는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4개국 신탁통치안에 뜻이 없으면서도 북한 지역에서의 반탁운동은 일체 금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구실로 1946년 1월 5일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한다. 처음에는 반탁 대열에 동참했던 남한 좌익들에게도 찬탁을 지시하고, 미소공동위원회에도 반탁을 고집하는 남한 우파의 참여를 반대한다.

소련군의 만행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조치 시행

혼란 조성을 위한 대남공작

소련군정은 남한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기 위해, 남한 좌익들을 지원하여 폭동, 파업등을 일으키게 하고, 5.10 총선을 통한 정부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여러가지 공작을 펼쳤다.

  • 화폐개혁
해방 직후 남북한은 한동안 구일본 화폐를 공통으로 사용했는데, 소련은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북한 지역에서 못쓰게 된 구일본 화폐를 남한 공산세력에게 내려보내 막대한 양을 유통시켜 혼란을 조성했다.

북한 정권 출범 전후

1948년 2월 8일에 북한 인민군이 공식 창건되고, 기만적인 남북협상이 진행되던 기간인 4월 29일에는 북한 헌법이 채택되어 남한의 5.10 총선 이전에 북한은 이미 단독정부 수립 절차를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헌법 제정에는 소련이 깊숙히 개입하고 있었다.

1948년 4월 12일자 문건. "김일성 동무에게 보내는 충고"
1948년 4월 24일자 문건. "조선의 헌법문제에 대하여"
인공국(人共國)의 헌법(憲法) 1948.05.03 조선일보 1면


1948년 9월 북한 정권의 공식 출범 당시 레베데프가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한 북한내각의 각료 등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정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요직의 인사 문제에 소련이 깊숙하게 간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정권 출범후 소련 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종식되고, 소련군도 1948년말까지 철수한다. 하지만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가 초대 평양주재 소련대사를 맡아 소련대사관이 군정청의 역할을 넘겨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소련은 또 비밀 경찰조직 특경부(特警部, Special Police Section)를 운영하며 김일성 등 북한 정권 요인들의 동태를 감시했다.

평가

함께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