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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북한에서는 신격화 되어 있고, 근자에는 한국에서조차 학계가 종북화되어 북한의 조작된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며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고, 그가 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은 교과서에도 들어와 있다. 보천보사건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언론과 학계조차 김일성의 실상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개요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이 어떠했고, 집권 후에 무슨 일을 했는가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전에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는 다소간 참고는 할 수 있겠으나 큰 의미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는 중요하지만, 그 전에 별 영향력이 없던 시절에 한 일들을 시시콜콜 다 캐내어 논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고질병은 나중에 지도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 그가 지도자로서 한 일은 무시하고, 그전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느냐로 평가하려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일제시대에 무얼했든 이전에는 관심도 없다가 지도자가 되어 훌륭한 일을 하면 그 일에 대한 평가는 내팽개치고 일제시대 일만 뒤져 친일파로 몰아 모든 업적을 부정한다. 또 지도자가 제아무리 폭정을 해도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했다며 영웅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자신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는 따지지 않고,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던 시기의 일만 가지고 모든 평가를 재단한다. 이렇게 해서 조작된 김일성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엄청난 항일투쟁을 했으니 그가 지도자가 된 후 국가를 사유화하여 국민을 노예로 부리고 제마음대로 죽이고 가두며,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최고권력을 세습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이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지만 김일성 일족의 노비될 자격은 충분하다 하겠다.

이 세상에서 한국인들의 지도자 노릇하기가 가장 편할 것이다. 아무리 깽판을 쳐도 지도자가 되기 전에 한 일 중에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 내세울만 한 게 한 가지만 있으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영웅으로 대접받으니 말이다.

김일성에 대해 집권과정과 집권 후에 한 일로 평가하면 자동적으로 사상 최악의 지도자를 면할 수 없지만, 이를 정당화시키는 유일한 탈출구가 지도자가 되기 전에 했다는 항일투쟁이다. 후일 지도자가 된 인물을 일제시대 경력으로 평가하려는 것을 한국인들은 워낙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실제로 무슨 항일투쟁을 했고 어떻게 해서 권력을 잡았는지 실체를 다 밝혀보고자 한다.

어떻게 해서 북한 지도자가 되었나?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상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냈다. 1941년에 몇 달간 만주로 파견나가기는 했지만 항일투쟁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다. 남들이 목숨걸도 투쟁할 때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집권 후 소련군 경력은 숨기고 항일투쟁은 자기 혼자만 다 한 것처럼, 북한을 자신이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끝까지 투쟁한 사람들을 숙청, 처형했다.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비밀요원으로 소련군 상관들의 신임 얻어

김일성이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대체적인 과정은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속했던 88여단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소련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산하로,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 대장 아래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orkin, 1899~1980) 소장이 88여단 관련 일들을 관장했다.

당시 김일성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이었고,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그는 이런 비밀 역할을 잘 수행하여 소련군 상관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소련군 상관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이 진지첸 대위를 발탁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게되면서 북한 지역에 지도자로 내세울 사람을 급히 구하게 된다. 일본전을 위해 설치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푸르카예프 대장과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 상장이 후보자 물망에 오른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불러 면접시험을 보고 그를 적임자로 모스크바에 추천해 올린다. 소르킨 소장은 당시 소련의 2인자였던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 ~ 1953)가 신임하던 사람이었다. 베리야가 극동에서 올라온 NKVD 보고서 (소르킨), 극동군 총사령부의 면접 보고서 등을 본 후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강력히 추천하고,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1945년 9월 초 머나먼 극동 군부대의 말단 대위 진지첸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시험을 보고 그 자리에서 지도자로 결정한다.

소련군의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 공작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북한 현지에서 그가 실제로 지도자 노릇을 하자면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진지첸 대위가 국내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라는 점과, 북한지역에서 조만식에 대한 지지가 워낙 높다는 점 두가지였다.

전설화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첫번째 난관은 진지첸 대위를 당시 국내에서 이름은 유명했지만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하여 돌파를 시도한다. 이때문에 진지첸 대위에게는 줄곧 가짜라는 꼬리표가 달리개 된 것이다.

해방 후 1920년경부터 유명했던 전설화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부친 김형직이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되라 가르쳐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은 것이 아마도 그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이유인 것같고, 종국에는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함.

소련군의 조만식 제거

두번째 난관은 조만식이 신탁통치에 대한 지지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신문 방송에서 그를 친일파로 몰게 한 다음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이 되어 인민의 주권을 강탈

소련군정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원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길을 막고,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꼭두각시 지도자 김일성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 선거의 형식을 빌리기도 했지만 인민들은 자유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흑백함 투표 등을 통해 정해진 결과를 추인하는 투표밖에 할 수 없었다. 인민의 주권을 박탈한 것이다.

소련군이 무에서 창조해낸 지도자

소련은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하던 김일성에게 이런 저런 조직을 만들어 그 장으로 앉혀주고, 1946년 2월 8일에는 사실상의 임시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앉힌다. 이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올라가게 된다. 모든 일을 입안하는 최종결정권자는 여전히 소련이었지만 표면에 김일성을 내세워 그가 하는 것처럼 꾸며 대중들에게 그가 지도자임을 각인시켜 나간다. 3년간의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지도자 견습기간이고, 그가 지도자 노릇을 하는데 필요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기간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의 정치공작을 통해 점점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서 마침내 1948년 9월 9일 정식 수상으로 취임한다.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점점 확고하게 다져가서 세습전제왕조를 만들게 된다.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한 레베데프 소장은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는 그리고리 메클레르의 회고나,[2]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 (We created him from zero.)"고 말한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1915~2006)의 후일 증언은[3]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해방 당시 그가 과연 지도자가 될만큼 주요 인물이었나?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국내서 미지의 인물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의 존재나 거기에 진지첸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 복무하다 온 사실을 끝까지 숨겼고, 북한은 수많은 당시 문서가 공개된 오늘날에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몰래 귀국하여 가명쓰며 숨어다닌 이유는?

자력으로 정계에 얼굴 내밀 능력 안돼

만일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군의 배경이 없이 부하 몇명만 데리고 귀국했다면 국내의 정치판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그는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친족과 고향마을 사람들 몇명 외에는 없었다. 당연히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 수도 없었고, 지지세력도 없었다.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그가 자기 혼자 힘으로 정치판에 얼굴내밀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오."한들 믿어줄 사람도 없었고, 돌이나 맞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대중 집회를 조직해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데뷔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 이런 저런 정치조직이나 행정조직을 만들어 그를 장으로 앉혀주고, 반대파들을 적당한 구실을 붙여 억눌러 제압해주고, 소련군이 장악한 언론이 그에게 촛점을 맞추어 띄워준 덕택에 겨우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해방 직후 거론되던 유력한 김일성은 다른 사람

해방 직후 북한 김일성 출현 이전 언론에 보도된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다른 사람이었다.

잡지 선구의 여론조사에 나오는 김일성도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없어.
선구의 조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로는 여운형 1위, 이승만 2위, 김일성 6위지만,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이승만이 압도적 1위, 김일성은 순위에 못들어.

국내 언론에 보도된 항일연군의 김일성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의 기사를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1939년초 ~1940년 여름 기간에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관한 보도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맹률이 80%를 넘고, 신문 구독자도 소수인데다, 여러 기사들 틈에 조그마하게 난 기사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보았다고 해도 김일성 부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양민들을 약탈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니 마적단 쯤으로 생각하지 대단한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여겼을 리도 없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그 후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해방 직후 남북한 및 미군정 문서의 김일성 경력도 보잘것 없어

  • 남한 언론에 보도된 북한 김일성 관련 초기 기사들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의도적으로 김일성을 폄하했나?

보천보사건을 둘러싼 여러 논란의 진실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나?

1937년 6월 보천보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그런 사건은 흔했다. 1933년 6월의 독산사건, 1934년 1월의 토성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여러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사건들보다 오히려 규모도 작은 보천보사건만 유독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 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보천보사건도 흔한 일과성 사건으로 곧 잊혀졌다. 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동아일보 호외를 핑계로 좌파들이 근거없이 지어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교과서에도 들어온 보천보사건

남한 교과서도 보천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4][5]

이번 교과서 논쟁에서 꾸준히 거론되는 사건이 보천보 전투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가 조국광복회 조직원들과 함경남도 보천보에 침투해 경찰주재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한다.

현행 교과서들은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이 공통적으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유일하게 김일성을 직접 언급한 동아출판은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였다”고 썼다.

교육부는 당시 일본 군·경이 입은 미미한 피해를 교과서들이 과장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가짜’란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의 생각은 다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주로 만주, 연해주를 본거지로 활동했기에 국내 투쟁으로는 보천보 전투가 특징적이라고 본다. 특히 동아출판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음을 밝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4]

조만간 별 의미도 없는 보천보사건이 김일성의 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질 기세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비서 황장엽(黃長燁)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본인이 자신의 항일투쟁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6]

한때 김일성 자신도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 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줄만한 사건이 아니며,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해방 당시 그는 중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진 소련인

역사 조작

소련군 아닌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조작하고, 해방전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다 와서는 목숨 걸고 끝까지 항일투쟁한 사람들을 숙청 처형하였다.

백두혈통 조작

김일성 영생교 (주체교)의 교주

김일성 미화 사례

한국 방송의 김일성 미화 사례

[KBS 역사저널 그날]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youtube 2020. 3. 2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2002.02.03) : YouTube 방송보기

함께 보기

각주

  1.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朴吉龍,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I want you[Grigory Mekler]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Kim Il Sung, who gained the rank of major in the Soviet army, returned to Korea in 1945 with the occupying forces, and Mekler and other Soviet advisers spent a year touring with him, even helping to write his speeches. "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recollected the Soviet colonel.
  3.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4. 4.0 4.1 [역사교과서 편향성 논란 해부]‘보천보 전투’ 상세히 소개 → 항일운동 대표사례 불가피 - 국민일보 2015-10-20
  5. [집중분석] 국사 교과서 편향성 논란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
  6.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