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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실체 김일성 (동명이인) 고동뢰 소대 참살사건
김일성 (6사장) 보천보사건 간삼봉 전투
혜산사건 동북항일연군 《국경의 비적수괴 김일성 회견기》
《애국지주 김정부(金鼎富)》 《국경경비진 주파기》 《김일성 부대의 양민 약탈 일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 민생단 사건 전설의 김일성장군 관련 해방전 기록
김일성의 소련 행적 김정일의 출생 소련군 88여단
극동의 소련군 소련의 만주와 북한 침공 북한의 소련 군정
「푸가초프」호 동진공화국 조각명단 해방정국 지도자 지지율
해방직후 북한 상황 북한 초대 내각 북한의 친일파 청산
남북분단의 현실화 과정 북한정권 감시기구 《특경부》 6.25 남침
《김일성 1912~1945》 (서평) 김일성(金一成, 1888~1926) 김정일 생년
김형직 (부친) 강반석 (모친) 김형권 (삼촌)
김혜순 (전처) 김정숙 (처) 김슈라 (차남)
김영주 (동생) 백두혈통 김일성 영생교

김일성(金日成, 1912~1994)은 북한에서는 신격화 되어 있고, 근자에는 한국에서조차 학계가 종북화되어 북한의 조작된 주장을 대부분 수용하며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고, 그가 했다고 주장하는 보천보사건은 교과서에도 들어와 있다. 보천보사건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언론과 학계조차 김일성의 실상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실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개요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에 대해서는 그가 권력을 잡는 과정이 어떠했고, 집권 후에 무슨 일을 했는가로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고, 그 전에 그가 무슨 일을 했는가는 다소간 참고는 할 수 있겠으나 큰 의미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는가는 중요하지만, 그 전에 별 영향력이 없던 시절에 한 일들을 시시콜콜 다 캐내어 논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고질병은 나중에 지도자가 된 사람에 대해서 그가 지도자로서 한 일은 무시하고, 그전 일제시대에 무엇을 했느냐로 평가하려드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일제시대에 무얼했든 이전에는 관심도 없다가 지도자가 되어 훌륭한 일을 하면 그 일에 대한 평가는 내팽개치고 일제시대 일만 뒤져 친일파로 몰아 모든 업적을 부정한다. 또 지도자가 제아무리 폭정을 해도 일제시대에 항일투쟁을 했다며 영웅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자신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위치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는 따지지 않고, 아무 영향도 주지 않았던 시기의 일만 가지고 모든 평가를 재단한다. 이렇게 해서 조작된 김일성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엄청난 항일투쟁을 했으니 그가 지도자가 된 후 국가를 사유화하여 국민을 노예로 부리고 제마음대로 죽이고 가두며,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동족을 살상하고 최고권력을 세습해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유민주국가의 시민이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지만 김일성 일족의 노비될 자격은 충분하다 하겠다.

김일성에 대해 집권과정과 집권 후에 한 일로 평가하면 자동적으로 사상 최악의 지도자를 면할 수 없지만, 이를 정당화시키는 유일한 탈출구가 지도자가 되기 전에 했다는 항일투쟁이다. 후일 지도자가 된 인물을 일제시대 경력으로 평가하려는 것을 한국인들은 워낙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김일성이 실제로 무슨 항일투쟁을 했고 어떻게 해서 권력을 잡았는지 실체를 다 밝혀보고자 한다.

북한 김일성은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는 소련이 내세운 괴뢰(앞잡이)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한 가짜이며,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은 좀 한 것 같으나 대단한 전공은 없다는 정도로 알려졌다. 당시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구체적 활동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뿐, 의도적으로 폄하한 것은 아니다.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은 일제시대 어린 시절부터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사람들이 해방 후 평양에 나타난 불과 33세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옛날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자 도저히 나이가 맞지 않기 때문에 사실로 인정할 수 없어 나온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일제시대 김일성 장군 이야기를 듣고 자라 북한 김일성이 가짜인 줄 직관적으로 알던 세대들이 퇴장하거나 세상을 떠나고, 학계를 좌파들이 주도하게 되자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이 부담스러워서, 또는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김일성을 가짜로 몰았다는 근거없는 주장을 내놓고 사람들도 이런 엉터리 주장을 따라 갔다. 그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알지도 못했던 보천보사건을 끄집어내어 동아일보가 당시 호외를 발행하여 크게 보도했기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이러한 일로 북한 김일성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알려져 해방 후 마치 북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집권하게 된 것처럼 주장한다. 타락한 종북 학계 때문에 이런 주장이 교과서에까지 들어와 버젓이 교육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료들이 새로 발굴되고, 새로운 증언들이 나와 북한 김일성의 실체는 좌파들이 장악한 학계 다수의 주장과 달리 과거에 알려졌던 쪽이 오히려 더 진실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다만 과거에는 몰랐던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 행적들이 상당히 밝혀졌는데, 그다지 대단한 것도 없을 뿐더러 북한이 자랑하는 소위보천보 전투도 실제로는 전사한 다른 김일성이 한 일을 자신의 공으로 가로챘다느 것까지 밝혀진다. 많은 사람들이 "김일성 신화"를 이야기 하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북한이 날조한 것을 남한의 종북 인사들이 받아서 떠들어댄 것에 불과하다.

김일성은 어떻게 해서 북한 지도자가 되었나?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

김일성은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상관의 허락도 받지 않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냈다. 1941년에 몇 달간 만주로 파견나가기는 했지만 항일투쟁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다. 남들이 목숨걸도 투쟁할 때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집권 후 소련군 경력은 숨기고 항일투쟁은 자기 혼자만 다 한 것처럼, 북한을 자신이 해방시킨 것처럼 역사를 날조하고, 끝까지 투쟁한 사람들을 숙청, 처형했다.

동료를 감시, 밀고하는 비밀요원으로 소련군 상관들의 신임 얻어

김일성이 소련에 의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되는 대체적인 과정은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속했던 88여단은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소련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산하로,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Maxim Purkayev, 1894~1953) 대장 아래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orkin, 1899~1980) 소장이 88여단 관련 일들을 관장했다.

당시 김일성의 이름은 진지첸(Цзин Жи-чэн)이었고,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을 맡고 있었으나, 빨치산 동료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르킨 소장과 푸르카예프 사령관에게 보고하는 NKVD (KGB 전신) 비밀 요원이었다. 그는 이런 비밀 역할을 잘 수행하여 소련군 상관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소련군 상관들의 추천으로 스탈린이 진지첸 대위를 북한 지도자로 발탁

1945년 8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게되면서 북한 지역에 지도자로 내세울 사람을 급히 구하게 된다. 일본전을 위해 설치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는 푸르카예프 대장과 극동군 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 상장이 후보자 물망에 오른 진지첸(김일성) 대위를 불러 면접시험을 보고 그를 적임자로 모스크바에 추천해 올린다. 소르킨 소장은 당시 소련의 2인자였던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 ~ 1953)가 신임하던 사람이었다. 베리야가 극동에서 올라온 NKVD 보고서 (소르킨), 극동군 총사령부의 면접 보고서 등을 본 후 스탈린에게 김일성을 강력히 추천하고,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1945년 9월 초 머나먼 극동 군부대의 말단 대위 진지첸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시험을 보고 그 자리에서 지도자로 결정한다.

소련군의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 공작

스탈린이 김일성을 지도자로 결정하기는 했지만 북한 현지에서 그가 실제로 지도자 노릇을 하자면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두 가지는 진지첸 대위가 국내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라는 점과, 북한지역에서 조만식에 대한 지지가 워낙 높다는 점이었다.

전설화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을 사칭

첫번째 난관은 진지첸 대위를 당시 국내에서 이름은 유명했지만 누구인지는 불분명한 전설적인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하여 돌파를 시도한다. 이때문에 진지첸 대위에게는 줄곧 가짜라는 꼬리표가 달리게 된다.

어릴 때 부친 김형직으로부터 김일성 장군 같은 사람이 되라는 교육을 받은 것이 아마도 그가 김일성이란 이름을 선호하게된 이유인 것같고, 종국에는 자신이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소련군의 조만식 제거

두번째 난관인 조만식은 신탁통치에 대한 소련의 지지 요구를 끝내 거절하자 신문 방송에서 그를 친일파로 몰게 한 다음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하여 모든 정치활동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 가장 유력한 공산주의자였던 현준혁은 1945년 9월 초에 암살 당했는데, 암살 사유는 그가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조만식에 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배후 인물로는 장시우가 거론되고 있다. 범인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잡히지 않았고 사건에 대한 조사도 흐지부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련 군정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정황이다. 소련군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반공 민족주의자 조만식에게 협력하며 힘을 실어주는 공산주의자를 제거할 필요가 느꼈을 것이다.

소련군이 무에서 창조해낸 지도자

소련은 국내에 지지세력이 전무하던 김일성에게 이런 저런 조직을 만들어 그 장으로 앉혀주고, 1946년 2월 8일에는 사실상의 임시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앉힌다. 이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이로 인해 농민들 사이에 김일성에 대한 지지도가 상당히 올라가게 된다. 모든 일을 입안하는 최종결정권자는 여전히 소련이었지만 표면에 김일성을 내세워 그가 하는 것처럼 꾸며 대중들에게 그가 지도자임을 각인시켜 나간다. 소련군정 3년간은 김일성의 지도자 견습기간이고, 그가 지도자 노릇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 권력 기관들을 만드는 기간이었다. 또한 북한 전역을 소련군 무력으로 강제적으로 공산화시키는 기간이기도 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발탁과 소련군의 정치공작을 통해 점점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서 마침내 1948년 9월 9일 정식 수상으로 취임한다. 이후 자신의 권력기반을 점점 확고하게 다져가서 결국은 세습전제왕조를 만들게 된다.


소련군정 당시 평양에서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한 레베데프 소장은 후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1]

이렇게 하여 우리 붉은 군대는 김일성을 조선인민들 속에서 ‘전설의 영웅’으로 불리던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시켜 북조선의 ‘위대한 수령’의 계단에 오르게 했다.
그를 수령으로 올려 놓기까지 붉은 군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일성도 소련군이 평양에서 철수할 때까지 소련과 소련공산당, 그리고 소련군에 대해 최대의 존경과 감사함을 갖고 행동했다.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는 그리고리 메클레르의 회고나,[2]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 (We created him from zero.)"고 말한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1915~2006)의 후일 증언은[3]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이 되어 인민의 주권을 강탈

소련군정은 북한 주민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원하는 지도자를 선택할 길을 막고,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운 꼭두각시 지도자 김일성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 과정에 선거의 형식을 빌리기도 했지만 인민들은 자유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흑백함 투표 등을 통해 정해진 결과를 추인하는 투표밖에 할 수 없었다. 결국 김일성은 스스로 소련의 꼭두각시 대리인이 되어 북한 인민들의 주권을 강탈해간 것이다.

소련군 진지첸 대위, 즉 까삐딴 진지첸(капитан Цзин Жи-чэн)의 변신 과정은 눈부시다. 중국공산당에 붙었다 소련군에 붙었다 하다가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간택받아 북한의 지도자 자리까지 꿰어찬 『까삐딴 진(капитан Цзин)』의 놀라운 변신술에 비하면 전광용(全光鏞, 1919~1988)의 소설 『꺼삐딴 리』[4][5]의 주인공은 차라리 애교스럽게 보인다. 현실은 항상 소설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하다. (꺼삐딴은 까삐딴을 다르게 적은 것이다.)

스탈린의 김일성 발탁이 북한 비극의 시작

스탈린에 의해 김일성이 북한 최고지도자로 발탁되자 그의 동료 빨치산 그룹이 북한 핵심 권력층이 된다. 이들은 평균학력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데다[6], 만주 산야를 숨어다니며 마적질인지 항일투쟁인지 모를 일들을 벌이다 소련으로 도주해서 소련군이 필요로 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었다. 국가 통치에 대한 어떠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고, 그에 대한 준비도 경험도 전무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집권하여 오늘날의 북한과 같은 나라를 만든 것이다. 이에 대해 인민군 소장 출신 여정(呂政, 본명 강수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7]

만주항일연군에 소속돼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았던 항일 빨치산들은 蘇聯(소련) 땅에 쫓겨갈 때까지 극좌노선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공부할 기회가 전혀 없어 정치이론을 배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소학교 교본조차 보지 못했다. 蘇聯(소련) 땅에 들어가 있는 5년동안 蘇聯(소련) 공산당 역사와 레닌주의 제문제를 배우기는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들이 보고 접촉한것은 전쟁에서 거칠어질대로 거칠어진 사람들 뿐이었다. 그 5년동안에 항일 빨치산들속에는 蘇聯(소련) 안전기관의 비밀정보원이 생겨나고 서로 감시하고 의심하는 악랄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政治(정치) 몰라 비극심화

항일빨치산들의 그런 공통적인 특징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것이다. 적개심만 있을뿐 정치가 무엇인지 모를뿐 아니라 실천경험이 없고 극단적 좌경노선을 그대로 갖고있는 이들에게 국가통치의 大權(대권)이 부여됨으로써 북조선의 비극은 심화됐던 것이다.

해방 당시 그가 과연 지도자가 될만큼 주요 인물이었나?

소련군 진지첸 대위는 국내서 미지의 인물

해방 당시 국내에는 소련군 88여단의 존재나 거기에 진지첸 대위와 같은 인물이 있는 줄을 아는 사람은 단 1명도 없었다. 김일성은 자신이 해방 직전 5년간 항일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소련군에 복무하다 온 사실을 끝까지 숨겼고, 북한은 수많은 당시 문서가 공개된 오늘날에도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 당시 김일성이 국내에서 무명인사였다는 증거 기록들

몰래 귀국하여 가명쓰며 숨어다닌 이유는?

소련군 88여단 1대대장 진지첸 대위는 해방 후 1달여 뒤인 9월 19일 블라디보스톡에서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극비리에 입북했다. 원산항에 마중 나온 인사들에게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다.

기차로 9얼 22일 평양에 도착해서는 김영환이라는 새로운 가명을 쓰며 비밀리에 국내 사정과 민심을 살피러 다녔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이승만이나 김구처럼 만인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곧바로 공개 행보를 시작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북한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환영인파도 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귀국하는 것을 공개할 수는 없었다. 1달여간 숨어다닌 이유도 국내사정을 파악하며 어떤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야할지 탐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기간에 김일성 장군의 이름이 국내서 유명하지만 누구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사칭하는 방안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소련군 문서에 김일성의 이름은 1945년 10월 1일까지는 진지첸으로 나오다가 10월 2일부터 김일성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 이때가 소련군 진지첸 대위가 전설의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한 날이다. 마침내 10월 14일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공개적으로 대중앞에 나선다.

자력으로 정계에 얼굴 내밀 능력 안돼

만일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군의 배경이 없이 부하 몇명만 데리고 귀국했다면 국내의 정치무대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그는 어릴 때 중국으로 가서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친족과 고향마을 사람들 몇명 외에는 없었다. 당연히 대부분 사람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 수도 없었고, 지지세력도 없었다. 조선말도 잘 못해 더듬거리던 그가 자기 혼자 힘으로 정계에 얼굴내밀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내가 바로 그 유명한 김일성 장군이오."한들 믿어줄 사람도 없었고, 돌이나 맞았을 것이다.

소련군이 대중 집회를 조직해 그가 "김일성 장군"으로 데뷔할 무대를 만들어 주고, 이런 저런 정치조직이나 행정조직을 만들어 그를 장으로 앉혀주고, 반대파들을 적당한 구실을 붙여 억눌러 제압해주고, 소련군이 장악한 언론이 그에게 촛점을 맞추어 띄워준 덕택에 겨우 자리를 잡아간 것이다.

해방 직후 거론되던 유력한 김일성은 다른 사람

해방 직후부터 10월 14일 북한 김일성이 출현하기 이전의 기록에 나오는 유명한 김일성 장군은 다른 사람이다.

잡지 선구(先驅)에 실린 1945.10.10 ~ 11.09 기간의 여론조사에서 가장 양심적인 지도자로는 여운형 1위, 이승만 2위, 김일성 6위지만, 대통령으로 지지하는 사람은 이승만이 압도적 1위, 김일성은 순위에 들지 못하고, 대신 군무부장 적임자로 1위에 올랐다.

잡지 선구(先驅)에 실린 여론조사에 나오는 김일성은 흔히 북한 김일성이라며 그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았다는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사람도 북한 김일성으로 볼 수 없고, 동진공화국 군무부장 김일성과 같이 전설적 이름 김일성 장군에 대한 지지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한 김일성이 여론조사 기간중인 10월 14일 평양집회에 처음 나타나긴 했지만, 남한 신문에는 이에 대한 보도도 거의 없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11월 초순까지도 김일성의 주목받을만한 공개적인 행보는 없었다.

일제시기 국내 언론에 보도된 항일연군의 김일성

1930년대 후반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의 기사를 검색해보면 1936년 가을 ~ 1937년말 기간에는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 1939년초 ~1940년 여름 기간에는 1로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에 관한 보도가 많이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당시는 문맹률이 80%를 넘고, 신문 구독자도 소수인데다, 여러 기사들 틈에 조그마하게 난 기사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보았다고 해도 김일성 부대가 마을을 습격하여 양민들을 약탈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니 마적단 쯤으로 생각하지 대단한 독립운동을 하는 것으로 여겼을 리도 없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고, 그 후에 나타난 제2방면군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맞다.

해방 당시 그는 중국인의 의식구조를 가진 소련인

김일성은 중국에서 교육 받고 중국인들 사이에서 성장하여 해방 당시 중국어는 능하지만 우리 말이 서툴고, 지적 수준도 낮았다는 증언이 많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북한에서 46년 9월부터 48년 2월까지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으로 재직하며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ML) 주의 이론 교육을 시켰던 박일(朴一, 페테르 알렉산드로비치)씨의 증언이다.

朴(박)씨는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8]

김일성은 소련어는 전혀 못했고, 조선말도 몹시 서툴렀다. 그는 중국말로 생각한 뒤 이를 조선어로 번역한 뒤 말하느라 말이 몹시 느렸다.[9]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10]

아래는 소련에 파견되었다 탈북한 북한 노동자 출신 이영일의 증언이다.[11]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공산정권이 무너지자 옛날에는 철저한 국가기밀로 되어있던 김일성에 대한 실화들이 러시아 신문지상에 공개 되군 했다.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말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기사도 직접 읽었다. 당시 스탈린 정권이 파견한 고려인 장교들에게서 한국말과 역사를 배우며 북한정권의 초대 수상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는 사실도 모두 신문기사에서 알게 되었다.

그때마다 강한 심리적 충격을 받았지만 이런 사실을 발설했다가는 어느 순간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는 공포심에 자신을 억제하군 했다.

이 외에도 해방당시 김일성이 우리 말에 서툴렀다고 증언한 사람들은 소련군정 장교들과, 10월 14일 김일성의 첫 연설을 현장에서 들었던 사람들[12] 등 셀 수 없이 많다.

해방 전 김일성은 혈통은 조선인이지만 만주에서 교육받고 성장하는 동안 의식 세계는 중국에 동화된데다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오랜 외국 생활로 인해 국내에 와서는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이러한 그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 리도 만무한데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항일투쟁의 영웅으로 조작되어 있다. 해방 당시 김일성은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지지 세력도 없으며, 학력이나 경력이 턱없이 미비한데다 우리 말까지 서툴러 지도자가 되기에는 무리한 상황인데도 소련은 그대로 밀고 나갔다.

해방 직후 남북한 및 미군정 문서의 김일성 경력도 보잘것 없어

아래에 해방 직후 남한 간행물과 미군정 문서에 나오는 김일성 관련 기록들이다. 북한 김일성의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잘 모르고 있다. 그는 당시까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증거이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간행되던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나 좌익지 조선인민보에 실린 북한의 김일성을 소개하는 기사에는 무조건적인 찬사만 잔뜩 늘어놓았을 뿐, 그가 실제로 어디서 무얼하다 온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정보도 없다. 당시 공산주의자들도 김일성의 실제 경력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이미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해방일보 1946년 4월 8, 9일자는 이에 대한 변명 기사를 싣고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도 없다.

해방 직후 북한 문헌에 나오는 김일성의 경력도 보잘것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상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김일성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13]

이승만, 박정희 정부가 의도적으로 김일성을 폄하했나?

위에서 본 대로 해방 당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미지의 인물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그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수많은 연구가 진행된 오늘날에도 그의 해방 전 전력은 여전히 논란거리인데,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있었던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거의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런 사람이 일찍부터 알려졌던 전설적 이름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니 가짜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종북화된 한국 학계에서는 이승만 또는 박정희 정부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또는 김일성의 항일 경력에 부담을 느껴 그를 가짜로 몰았다는 둥 하며 별별 말을 지어내어 김일성을 띄우고, 한국의 과거 정부를 비난하기에 열중한다. 심지어 친일파 박정희가 김일성의 항일투쟁 경력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그를 가짜로 만들었다는 희한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과거 문헌들이 전산화된 덕에 해방 전후의 김일성 관련 기록들을 다수 찾아내고, 공산권 붕괴 후 평양 소련군정 인사들의 당시 일에 대한 증언까지 나오면서 북한 김일성은 국내에서 무명인 처지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한 가짜가 맞다는 것이 재차 명백히 확인되었다. 박정희김일성에 대해 컴플렉스를 느껴 그를 가짜로 만들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었다. 남한에 김일성이 가짜라는 말이 많이 퍼진 것은 수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 때문이고, 1990년 이후 좌파학자들이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켜 놓았지만 그가 원래대로 가짜가 맞다는 것이 다시 명백히 밝혀진 것이다.

보천보사건을 둘러싼 여러 논란의 진실

보천보사건으로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나?

1937년 6월 보천보사건 때 동아일보가 호외를 간행하여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식의 어이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 그런 사건은 흔했다. 그 중에도 상당히 규모가 큰 사건인 1933년 6월의 독산사건, 1934년 1월의 토성사건, 1935년 2월의 동흥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여러 신문들이 호외를 간행하며 크게 보도했지만 오늘날 이 사건들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사건들보다 오히려 규모도 작은 보천보사건만 유독 유명해진 것은 북한 김일성이 집권하고 나서 자신의 항일 전공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보천보사건도 흔한 일과성 사건으로 곧 잊혀졌다. 이 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하루 아침에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도 동아일보 호외를 핑계로 좌파들이 근거없이 지어낸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

보천보사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집권한 때문에 보잘것없고 잊혀졌던 보천보 사건이 유명해지고, 주재소 경관 5명뿐인 국경의 산골 마을 습격사건이 무려 "보천보 전투"로 승격되며 대단한 항일 전공으로 되었다.

동아일보가 호외를 발행하여 보천보사건과 김일성 이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주장은 가짜로 알려졌던 김일성을 진짜로 둔갑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이전부터 유명했던 전설적 김일성 장군의 존재는 부인하고, 김일성 이름이 보천보사건 때문에 비로소 유명해진 것이라 주장하며, 그 사건의 주역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또 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지자 사람들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은 당연히 나이가 많을 것으로 잘못 생각해 젊은 북한 김일성을 가짜라고 한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펼친다. 희망사항을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가공의 소설일 뿐이다.

보천보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전사

보천보사건의 주역 동북항일연군 1로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두 사람의 동일인 여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으나, 많은 과거 사료들이 전산화된 후 검색으로 발견된 상당수의 새로운 자료들까지 종합하면 6사장 김일성은 1937년 11월 13일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나이는 35~36세 가량, 출신지는 함경남도 갑산군 회린면(혜산진)으로 북한 김일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북한은 보천보사건을 김일성의 최대 항일공적으로 조작하여 전적지를 꾸며 우상화 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전 노동당 비서 황장엽(黃長燁)은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본인이 자신의 항일투쟁에 대해서 했다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14]

한때 김일성 자신도 우리들에게 “우리가 무장투쟁을 크게 한 것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한 것이 안 한 것보다는 나을 터인데 왜 그것을 자꾸 깎아 내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든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하지만 그것이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줄만한 사건이 아니며, 북한을 ‘해방’하는 데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였던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북한 정권의 범죄집단적 행태는 항일연군에 기원

북한 정권이 보이고 있는 인권말살, 밀수, 위조지폐와 마약 제조 및 유통, 기쁨조 운용 등의 각종 범죄적 행태는 그 뿌리가 김일성 등 북한 핵심권력층들이 소속되었던 동북항일연군에 있다.

과거 신문들이 DB화 되어 손끝을 조금만 놀려도 항일연군 산하 부대들이 벌인 무고한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와 마약밀매 등의 행위들에 대한 기사가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 중 상당수는 6사장 김일성이나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부대가 한 일이다. 더 이상 미화하며 숨길 수가 없는 단계에 와 있다. 항일연군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는 당시 만주의 신문들에 실려 있을 것이나, 중국이 이를 DB화 하여 공개하지 않는 이유도 숨길 것이 많아서가 아닌지 의심된다.

역사 조작

해방전 5년간 아무 항일투쟁도 않고 소련군에서 편히 지내다 와서는 스탈린의 꼭두각시 대리인으로 발탁되어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집권하여 목숨 걸고 끝까지 항일투쟁한 사람들을 죄다 숙청 처형하였다. 1963년부터는 소련군 아닌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킨 것으로 역사를 조작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백두혈통 조작

김일성 영생교 (주체교)의 교주

김일성 미화 사례

한국 방송의 김일성 미화 사례

[KBS 역사저널 그날] 김일성, 평양 군중 앞에 서다 youtube 2020. 3. 24
잡지 선구에 실린 여론조사의 김일성은 북한 김일성이 아닌 동진공화국 조각명단의 김일성과 같은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이다. 소련군이 데려온 북한 김일성은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국내 사람들 누구도 잘 모르는 미지의 인물에 불과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048회]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2002.02.03) : YouTube 방송보기

한국의 교과서에도 들어온 보천보사건

남한 교과서도 보천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는 경우가 많다.[15][16]

이번 교과서 논쟁에서 꾸준히 거론되는 사건이 보천보 전투다. 1937년 6월 4일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가 조국광복회 조직원들과 함경남도 보천보에 침투해 경찰주재소 등을 습격한 사건이다. 북한은 이를 김일성 우상화에 활용한다.

현행 교과서들은 보천보 전투를 비중 있게 다뤘다. 금성·동아출판·미래엔·천재교육 등이 공통적으로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했다. 유일하게 김일성을 직접 언급한 동아출판은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북한은 이 사건을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하였다”고 썼다.

교육부는 당시 일본 군·경이 입은 미미한 피해를 교과서들이 과장했다고 평가한다. 김일성의 항일운동이 ‘가짜’란 주장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무비판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의 생각은 다르다.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주로 만주, 연해주를 본거지로 활동했기에 국내 투쟁으로는 보천보 전투가 특징적이라고 본다. 특히 동아출판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되고 있음을 밝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15]

조만간 별 의미도 없는 보천보사건이 김일성의 6.25 남침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질 기세다.

참고 자료

北 김정은 할아버지 김일성의 6가지 역사조작 사례

함께 보기

각주

  1.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룡,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박길룡 (朴吉龍, 1920~1997)은 전 북한 외무성 부상으로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고, 김국후는 한소수교 직후인 1991년 중앙일보 특별 취재반의 일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생전의 레베데프를 여러 차례 만나 평양의 소련 군정 당시 일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2.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I want you[Grigory Mekler]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Kim Il Sung, who gained the rank of major in the Soviet army, returned to Korea in 1945 with the occupying forces, and Mekler and other Soviet advisers spent a year touring with him, even helping to write his speeches. "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recollected the Soviet colonel.
  3.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레오니드 바신,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4. 껍데기만 남은 인간의 자화상, '꺼삐딴 리' - 에듀진 인터넷 교육신문 2017. 11. 2
  5. 《꺼삐딴 리》 위키백과
  6.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p.61~63, 제3장 제88정치여단
  7.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2> 1990.07.08 동아일보
  8.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9. 「金日成은 나에게 마르크스·레닌主義를 배웠다」 前 金日成大學 부총장 朴一 회고 / 朴 一 ,『신동아』, 1991년 10월호 pp.350-359 p.354
  10. 김일성의 이념교수 구소거주 한인 폭로 ◎“김은 빨치산 가담만하고 안싸워/항일투쟁 거짓말… 평범한 농부였다”: 국민일보, 1992-03-11
  11. [탈북 수기] 시베리아 벌판의 농노들 이영일 씨 <7> 통일신문 2015/06/12
  12.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의 증언 :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13. 김일성 장군(金日成將軍)의 약력(畧歷) : 우리의 太陽 : 金日成 將軍 讚揚特輯.(김일성장군 찬양특집) (平壤 : 北朝鮮藝術總聯盟, 1946. 8.15) p.1 (p.4)
  14. 황장엽, 《북한의 진실과 허위 : 북한민주화 전략집》 (시대정신, 2006.04.15) p.40
  15. 15.0 15.1 [역사교과서 편향성 논란 해부]‘보천보 전투’ 상세히 소개 → 항일운동 대표사례 불가피 - 국민일보 2015-10-20
  16. [집중분석] 국사 교과서 편향성 논란 : 월간조선 2015년 2월호